그림은 느낌이다. 산이 아니라 산의 느낌, 물이 아니라 물의 느낌, 나무가 아니라 나무의 느낌이다. 느낌을 그릴 줄 아는 이야말로 진정한 화가가 아닐까.
아마추어들은 묘사에 치중하지만, 프로는 느낌에 기댄다. 삼차원의 세계를 이차원의 공간으로 치환하는 원리가 공필과의 대척점에 있다는 것을
아마추어들은 깨우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렇다면 느낌은 무엇이고, 느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느낌은 먼저 손이 기억하는 감각이다.
그 감각은 작가의 기질이 조종하지만, 손의 기억은 긴 인고의 시간들이 쟁여진 창고와 같다. 그런 점에서 김예순은 다작가 중에서도 다작가로 통한다.
“포도를 보고 똑같이 묘사하는 것은 일반인도 할 수 있지만, 포도의 달콤한 향기를 맛보게 하는 것은 화가의 몫이다.”-작가 노트
회화 작품이란, 빛의 투영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색 자체가 빛이기도 하지만 김예순의 작품은 특히 백색에 대한 비중이 높은 편이다.
백색은 명도의 조정자로서 밝은 화면을 조율해 내는데 없어서는 안될 채료이기도 하지만, 김예순은 특히 백색을 잘 부리는 화가로 주목받고 있다.
밝다는 것은 가볍다는 느낌을 동반하지만, 작품이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거친 마티에르 효과가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김예순은 사물에 대한 해석력에 더해 독특한 뉘앙스를 감각시키며 자신만의 취향을 부각시켜 나왔다.
나이프페인팅 기법은 경북 작가로는 경주의 손수택(1919~1978)이 40년대 후반 처음 선보인 이래 뭇 작가들이 애용하는 기법으로 자리잡았다.
김예순이 붓 대신 나이프로 선회하게 된 것은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개발코자 한 욕구 때문이었다. 선배 화가 류윤형(1946~2014)으로부터
출발한 안동 구상, 말하자면 안동 화풍과의 의도적 단절을 결행하는 과정에서 도출시킨 방법론이었던 것이다. ’95년 이후, 5년간의
영양 칩거(수비중 근무)는 현재의 화풍으로의 변신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자신감을 배양해나갔던 해방구기도 했다.
김예순의 소재 취향 역시 여느 구상화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풍경 속 점경인물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며, 그 인물들이 점차 확대되어
인물화로 독립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인물이 배경이나 요소가 아닌 주 모티브화 해가는 과정에 스냅 장면이 포함되기도 하고,
가족 테마와 같은 기록적 의미도 삽입된다. 이 지점에서 김예순의 회화적 환원감각을 읽을 수 있다. 거기에 나이프페인팅 기법과 주조색인 백색,
그리고 느낌에 기댄 작가만의 감각이 자리한다.
갤러리 즈음 관장 송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