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의 강덕창은 '고함'을 내지르던 열혈아였다. 시대의 분노에 기꺼이 투신했다.
80년대 '힘전'에 출품했던 작품은 군화발에 짓밟혔다. 독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로 끌려갔다.
제대 후 곧장 상경했다. 시골 출신 아나키스트는 외로운 늑대였다. 붓에 물감이 마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벽화를 그렸고 무대미술에 몰두했다. 유일한 희망은 자신만의 세계를 고수하는 일이었다. '고함'은 잦아들고, '중얼거림'이 육화되기 시작했다.
'고함'이 외부를 향한 감정의 표출이었다면, '중얼거림'은 내면의 울림이었다.
강덕창의 회화는 시대의 맥락 위에 편승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 생애의 농축이며, 무의식 에너지의 분출이었다.
강덕창은 상상력의 화가다. 낯선 형상과 가공되지 않은 원색으로 화면을 직조해낸다.
장식적 분위기조차 느낌을 재생산해내는 문맥으로 읽혀지고 있다. 그의 원색은 오방색이라는 전래적 근원에 닿아있음이 아니라
그 자신 내면의 순수성에서 비롯됐다. 중성색이란 순화된 색, 발효된 색, 우회화법의 색이다. 대화의 기술 같다.
강덕창은 대화보다는 독백을 택했다. 독백은 소통의 부재로 인한 해석의 오류, 혹은 자의적 해석이라는 우려를 노정시킨다.
하지만, 독백에는 가식이나 타협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직설적이고 비타협적인 기질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은 '중얼거림'의 미학,
즉 상징과 비유, 추상으로 복선을 깐다.
작가 자신은 말한다. "내 작품은 '현실의 삶 속에 비춰진 내면의 거울' 이다." 그 거울 앞에 서보자.
'빈자리'이라고 이름 붙인 작품 앞에서 어떤 이는 순환의 이치를 파악했다. 의자는 네 개의 손가락 나무숲 속 어느 한 나무임이 분명하다.
분홍색 칠을 한 의자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가 떠났을 수도 있다. 숲을 이룬 네 손가락들도 언젠가 대지의 원소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손목은 흙으로 녹아들고 있고, 먼 곳을 향한 엄지손가락도 사막 같은 흙빛이다. '잃어버린 사월'은 팽목항의 비극이 내재된 그림이다.
아니, 자신의 내면을 형상화한 알레고리일 수도 있다. 눈치 챌만한 색상의 징후도 없이 익숙한 형상들만 능청스레 환을 짜고 있다.
그 순환의 고리 속 평화로운 바다는 온갖 비의와 모순, 체념이 가산혼합 된 광경일 뿐이다. 또렷한 현실은 돋보기 속 종이배가 전부다.
'신은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이 있다, 강덕창의 그림의 또 하나 특징이 바로 '디테일' 이다. 독백하는 자는 섬세하다.
빈틈없는 완결성으로 그의 화면은 한사코 진지하다. 하나의 아이디어에 '시리즈' 효과를 얹지 않고 한 점 한 점마다 독립된 이야기로
옴니버스를 구성하는 것 또한 작가만의 특별남이다. 강덕창은 자유인이다.
일본 작가 기사미 이치로는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강덕창에게로 향한 미움은 서툰 대화법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독백의 사유는 안료화가 아니라 염료화 된 그 무엇이다. 염료화된 사유는 작가의 생애 속에 침착된 본성이자 '자유'인 것이다.
'미움'만으론 그 자유를 기스낼 수 없다.
세상은 강덕창을 주목하게 될 것이고, 미움은 사랑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작품 앞에서 작가처럼 독백을 흉내 내지 말고, 대화를 터보시라 권해 드린다.
갤러리 즈음 관장/ 문화예술공간 즈음
대표 송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