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일흔 세대의 수채화가들은 스승 없는 편력의 시대를 헤쳐나온 경우가 많다. 수채화가 유화의 그늘에 가려 독립화로서의 기능이나 가치를 담보 받지 못했음에도 스스로 그 길을 감내해 온 바가 적지 않은 것이다. 유화라는 양지를 마다하고, 수채라는 음지적 재료에 그토록 탐닉해온 작가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일찍이 수채화가 배동신(1920~2008 광주)은 유화를 육식에, 수채화를 채식에 빗대어 말한 적이 있고, 박기태(1927~2013 울산) 역시 한국인의 성향은 기름보다는 물에 가깝다는 인식을 언표하기도 했다.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정봉길 역시 물그림에 대한 체질적 확신이 투철했음을 느끼게 된다.
수채화를 문학에 비유할 적에 여러 장르 중에서도 특히 시(詩)를 떠올리게 됨은 왜일까. 시의 운율처럼 경쾌하고 함축성을 지닌 점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정봉길의 수채화엔 자연을 운율에 맡긴 듯한, 정서의 산책길 같은 울림이 있다. 짙고 무거운 듯한 채색은 빛과 색의 콘트라스트(contrast)를 빚어내는 역설의 투영처럼 느껴진다. 표상 너머의, 보지 못했던, 볼 수 없었던 자연의 이상이 어렴풋한 깨달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초록색에서 살아있는 기(氣)를 느끼고, 늦가을 들판에서 인생의 평온함을 같이 하며, 하얀 설국에서 생(生)의 심오함을 본다. 대지와 대지 사이에서 울림을 느껴보고 싶다.”
사생화가였던 정봉길에게 표현의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오십 무렵이었다. 거기엔 의형제의 연을 맺은 중국인 서예가와의 ‘관시(关系)’의 10년 세월이 자리한다. 그를 통해 중국대륙의 곳곳을 누비면서 확장된 대자연을 마음껏 호흡했다. 저절로 구도나 스케일, 색채의 변화가 뒤따랐다. 기법 또한 투명화에서 불투명화로 전이됐다. 대자연에서 느낀 환희심, 그 심적 충격을 표출하기엔 투명기법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투명’ 방식은 무채색의 가미로 얻는 게 아니라 투명재료로서 불투명화 해낸 자득의 방식이었다. 당연히 색감이나 재구성력, 일필휘지할 수 있는 필력의 수반이 뒤따라야만 가능한 방식이었다.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즉흥과 몰입이 빚어낸 개성의 산출. 이처럼 중국대륙에서의 경험은 ‘사생’이라는 날것에서, 흉중성죽(胸中成竹)의 직조법으로 옮아가게 만든 것이다.
한창 중국을 드나들 때 중국인들을 매료시킨 작품이 ‘엉겅퀴’였다. 붉은색과 초록의 보색효과는 특히 초록을 잘 다루는 정봉길 식의 마법이었다. 엉겅퀴 그림은 구체적 대상과 추상적 배경이 섞이지 않은 채 서로를 돋보이게 하는 색채 감각의 절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보성에 대한 운용방식은 빛을 다루는 방법에서도 응용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탁한 듯 맑으며, 어두운 듯 밝고, 가벼운 듯 무거운 역설적 화면. 그 속에서 느껴지는 관조의 깊이. 사생이 상품화 전의 신뢰감 정도라면, 사색으로부터 비롯된 가공된 느낌의 세계야말로 레테르가 붙은 상품일 터다. 정봉길은 내면을 사생하는 작가다. 여행으로 얻은 체험적 이미지들은 기록화처럼 내면에 저장되어 있다가, 흉중성죽의 기회가 되면 언제든 봇물처럼 그림으로 터져나오는 것이다.